함석태가 졸업한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는 사립으로 1907년 설립되어 처음에는 공립치과의학교로 발족했다가 1909년 6월 1일 일본치과의학교로 변경되었고, 1909년 8월에는 제반 시설을 확충하고 전문학교령에 따라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Fig. 1). 1909년 8월 전문학교령에 의해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 수업연한도 종래 2년에서 3개년 과정으로 연장되었다. 일본 치과의학전문학교의 2년 과정을 마친 학생 16명은 1911년 인정 제1회로 졸업하였다. 전문학교로 지정되어 1년 과정을 더 수업한 학생 54명은 1912년 지정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함석태는 2년 과정을 마치며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1912년에 졸업하였다(Fig. 2). 1912년 인정 제2회 졸업생은 15명이고, 함석태와 함께 입학했던 107명은 1년 더 수업을 받은 후 1913년 지정2회로 졸업하였다. 함석태는 1936년 치과잡지 만선지치계에 게재한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처음에는 일본에서 전공으로 이비과(耳鼻科)를 전공하려 하였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조선의 치과계 발전을 위해서 1913년 12월 고국으로 돌아왔다[1]. 함석태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것은 1912년(大正元年)이었는데 재학 당시는 누구나 다 같은 심리겠지만 특히 당시 조선에서 머나먼 일본에 유학이라도 하는 유학생의 심리는 학문을 마치고 소위 금의환국(錦衣還國)한다는 하나의 공명심은 아마 상상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런데 조선 사회를 살펴본 즉 치과의학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고 가령 개업을 해도 아무런 이해(理解)가 없는 일이라면 마치 10년 공(功)도 일실(一實)에 귀(歸)하는 격이라서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차라리 치과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이비과(耳鼻科)를 또 하나 전공하고 돌아가면 하는 마음으로 동경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교장을 비롯 선배들이 말하기를 옛날의 일본과 현재의 조선과는 치과의 발전 상태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런 의미에서 조선은 장래가 유망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서 개업하라는 격려를 받아 용기백배하여 1913년(대정2) 세모에 귀국했다. 1925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에서 펴낸 일람에 나온 학교 교사 전경의 모습을, 박슬기 작가에 의해 더욱 멋지게 복원된 그림이다(Fig. 3). 현재 일본치과대학은 도쿄와 니카타(Niigata)에 각각 2개의 치과대학이 있으며, 재학생은 2000명, 교수는 1000명이다. 지금까지 22,152명의 치과의사를 배출하여 일본에 있는 치과의사 7명중에 한 명이 일본치과대학 동문이다. 2025년 4월 대한치과의사학회 임원진은 함석태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일본 치과대학을 방문하였다(Fig. 4).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뜻깊은 행사였다. 함석태는 1914년 2월 5일 조선총독부 치과의사 면허번호 1번으로 등록하였다(Fig. 5). 이 치과의사 면허는 1913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치과의사규칙이 반포된 후 한국에서는 최초의 치과의사로 등록된 것이다. 그는 경성 삼각정 1번지에 2층 목조 건물(지하 1층)을 짓고 1914년 함석태 치과를 개원하였다. 1914년부터 1935년까지 함석태 치과 신문 광고에 의하면 그는 계속 삼각정에서 개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Fig. 6). 함석태는 1924년 2월 11일 동아일보에 개원 당시 한국의 치과적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조선인 12명의 치과의사가 개원하였으나 존속하지 못할 정도로 그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치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음을 한탄하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함석태는 자기 영업 즉 치과 개원생활 이외에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심상소학교에는 자신을 포함한 일본인 치과의사 수십명이 촉탁의로 선정되어 구강 검사를 시행하고 있는데, 조선인 학생들이 있는 보통학교에는 이러한 구강 검진이 행해지지 않고 있는 점에 안타까워하고 있다[2].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914년(대정 3년)에 본인이 개업할 당시에 경성에 일본인 치과의사가 4인이요. 조선인측으로 본인이 1인 이든바 10년 후인 1924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은 21인이 되고, 조선인은 역시 1인에 불과하오니 참으로 안타깝고 기이한 할 일이 아니오니까. 무릇 조선측으로도 이 기간에 12인의 개업자가 있었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존속(存續)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구강위생 사상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를 조선인에 비하야 대략 4분의 1이나 3분의 1이라고 가정하면 소수의 인구로 능히 20인 이상의 치과의사를 용납하는데 조선인은 그것의 4분의 1이나 3분의 1이상의 다수로서 오히려 23인의 치과의사 문호를 유지하지 못하는 그것이 즉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 우리의 발전상으로 우리의 10년간이라 하면 선진자인 그들의 100년간에나 상당하다고 할 만한 이 다사다난한 10년 안에 우리가 20인이나 늘었다하면 거의 순조로운 향상 발전이라 할지 모르나 도리어 10년 전 1인은 역시 10년 후에 1인에 불과하오니 정말로 비탄(悲嘆)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일본인 동업자는 항상 본인을 향하야 자네는 독무대이니까 좋으리라고 칭찬합니다만 이 독무대야말로 무슨 의미의 독무대입니까? 잠깐 대답하기 거북합니다. 가령 엎어진 둥우리에 한 개의 알이 완전하였다면 그런 의미의 독무대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 부끄럽고 내 자신이 한탄스럽습니다. 1915년 12월 1일 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함석태의 개업지와 개업 월일이 적혀 있는데 개업지는 송현동 68번지, 개업일은 1915년 10월이다. 함석태는 1914년 3월 11일 치과의사 등록번호 1번으로 면허를 받았고, 매일신보 1914년 6월 19일 광고에 의하면 경성남부곡교 신가(新街) 삼각정에 개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함석태 관련 사료에 약간의 혼동을 주는 자료를 발견하였다(Fig. 7). 1915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함석태 개업지 주소 경성부 송현동 68번지는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없다. 지도상에서 송현동 67번지는 2개가 있는데 68번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1933년에 제작된 지도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지도상에서 조선생명이 있는 곳이 68번지라고 추측된다. 현재 네이버 지도와 1933년 제작된 경성정밀지도상에서 송현동 크기와 모양은 거의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주소인 송현동 68번지를 현재 지도에 검색하면 송현동 72-1 또는 61-1 이런 주소가 뜨는데, 이곳을 직접 가보니 높은 펜스가 쳐져있는 곳을 지목한다. 송현동 68번지는 안국동과 경계부에 해당된다. 따라서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 펜스 끝부분이 함석태 개업지 주소인 송현동 68번지로 추청된다. 인터넷 지도로 송현동 68번지를 찾아보니 삼각정에 있는 함석태 치과와 1킬로미터 남짓 거리이다. 1935년 이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석태 가족사진이 촬영된 곳이 관보에 나온 송현동 68번지이고 함석태의 자택이라 추정된다. 광복 후 함석태의 행적은 미궁에 쌓여 있지만 현재 함석태 치과 터는 다행스럽게 공유지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지도상으로는 청계천 한빛 광장의 가장 우측 모서리에 해당된다(Fig. 8). 일제강점기 지도와 현재 네이버 지도를 비교해보니 삼각형 모양의 대지가 일치한다. 함석태 치과 터에 어떤 기념물이 있었으면 하는 게 필자의 바람이다. 이러한 염원을 담아 이미지 상으로라도 기념 표지판을 만들어 보았다. 표지판에 들어가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함석태 치과 터토선 함석태(1889~?)는 1914년부터 광복 때까지 경성부 삼각정 1번지에 함석태 치과를 개원하였다. 이곳이 바로 함석태 치과가 있었던 삼각정 1번지 주소의 일부분이다. 함석태 선생은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치과의사가 되었고, 이곳에 한국인 최초로 치과를 개원하였다. 그는 일본인 치과의사들로 구성된 조선치과의사회에 대항하기 위해서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를 창립하였고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국민들의 구강위생 계몽에 헌신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하면서 우리의 얼을 보존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1944년 소개령이 내려지자 자신의 수장품을 꾸려 고향인 평양북도 영변으로 잠시 머물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 선생은 대한민국 치의학 개척자, 일제강점기 대항과 구강위생 계몽의 선구자, 문화재 독립운동가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인 함석태는 1914 년 경성에서 치과를 개원한 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조선 백성들의 치과 치료에 대한 인식 정도, 입치사(入齒師)들의 비윤리적인 진료행위, 구강위생 계몽을 하기 위한 척박한 현실과 같은 문제들은 유일한 조선인 치과의사 함석태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특히 입치사들이 어지렵혀 놓은 일반 국민들의 치과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데 고군분투하였다. 1936년 만선지치계에 게재한 회고록에 입치사에 관한 일화가 내용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 당시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1]. 경성에 돌아와 보니 일본 사람측은 고사하고 조선 사람측은 입치사 3-4명과 서양인의 닥터 한대위(韓大偉, 조선 성명으로 하여 치과를 경영함은 특히 조선 사회에 영합하는데 일대 광고술이라 할 수 있다)란 사람 등이 조선 사회의 상하는 통한 당면의 치과의사였다. 또한 입치사도 치과의사의 간판을 걸고 있는 혼돈 상태이다. 이런 이해 없는 배경하에서 약관표표 단신으로 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 사회에 조선 사람으로서 효시적 신사업을 위하여는 주소를 받지 않도록 당당한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여, 또한 사회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데도 필요하고, 한편 금후의 동업자 즉 후진자의 전도를 열어주는데도 책임이 있으므로 한다면 훌륭히 하지 못해도 빈약하게는 하지 않겠다는 두 가지 정반대의 분기점에서 방황하고 있을 무렵 재미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 이야기가 옆길로 들어갈는지 모르지만 한 토막의 말로써 당시 사회의 치과에 대한 지식의 단면을 소개하게 되므로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당시 3-4명의 입치사 중의 한 사람으로 남대문통 1정목, 지금의 동일은행 옆에 한성치과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당당히 조선귀족사회와 일반 상류층을 단골로 하고 있던 입치사로서 박교상(朴敎祥)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1913년(대정2) 10월경에 총독부에서 조선의사법 치과의사법을 제정하여 1914년(대정3) 1월 1일부터 실시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서 입치영업자가 의원의 간판을 내걸지 못하게 되자 박교상은 서양인 기독교 목사를 의지하여 치과의사 자격을 얻는 목적으로 입치영업을 그만두고 서양으로 갔다. 1914년 매일신보에 실린 함석태 치과 광고 문구에 그의 고민이 담겨 있다(Fig. 9). ‘수술무료’는 일제강점기 입치사들과 경쟁해야 했던 전문직 치과의사의 고뇌어린 결단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태는 구강위생 계몽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닫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기 위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3.1 운동이 발생한 1919년 7월 매일신보에 실린 ‘구강위생에 대한 주의’라는 함석태 칼럼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강위생에 관한 칼럼으로 보인다[3]. 함석태는 일제강점기 백성들이 치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치아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또한 칫솔의 사용 및 보관법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동아일보 1924년 2월 11일 칼럼에 의하면 함석태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심상소학교에 촉탁의로 지명되어 구강검사를 시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난 수년 동안 구강검진이 연례행사이었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25년 3월 종로소학교 교장인 편강(片岡)이 함석태가 일본인 학생들을 검진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아일보 3월 21일 기사는 일본인 교장의 이러한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Fig. 10).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의사의 신성을 무시하고 편강 교장이 함석태 구강 검진의 촉탁을 거부함에 따라 함석태는 다른 일본인 치과의사와 촉탁의를 교환하여 서대문소학교에서 구강 검진을 하게 되었다[4]. 조선일보 1925년 3월 23일 조선일보 1면에 ‘기괴한 우월감’이라는 짧지만 강력한 기사가 실렸다[5] 1930년 8월 10일 조선일보에 실린 ‘가정에서 알어야 할 니병과 니에 위생’이라는 칼럼에서 청년 함석태 선생의 사진을 발견하였다(Fig. 11). 그토록 함석태 선생의 사진을 찾으려고 애쓸때는 실패했었는데 ‘구강위생 계몽’으로 검색을 하다가 희미한 사진을 찾게 되었다. 오래된 사진을 사진 복원 전문가인 김충식 선생에게 의뢰하여 예술작품으로 복원하였다. 복원은 3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Fig. 12). 첫째 거친 피부 톤을 정리하고 음영을 구분한 후 1차 윤곽을 스케치한다. 둘째, 1차 채색과 배경을 구분한다. 셋째, 세부적 윤곽과 피부 톤을 보완하면서 완성한다. 일제강점기 구강위생에 관한 칼럼을 아홉 번이나 게재한 치과의사는 함석태 뿐인 것으로 추정된다. 9개의 칼럼을 읽으면서 함석태 선생이 얼마나 조국과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원고를 썼는지 알 수 있다. 그의 4번째, 5번째 신문 칼럼 원본에 일부 소실이 있다. 신문지 일부가 찢어져 사라졌을 뿐인데 그 부분을 보고 있노라니 안타깝다. 또한 그 부분을 영영 볼 수 없다니 슬프다. 1924년 2월 11일 동아일보에 ‘구강위생 긴급한 요건’이라는 칼럼에서 조선인 아동들을 대상으로 구강 검진 및 구강 위생 계몽 활동이 시행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함석태의 소망은 1933년 실현되었다. 1933년 시내 정동에 있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에 학부형인 한응수(韓應壽)가 기증한 일천 오백원으로 위생실이 설치되었다(Fig. 13) [6]. 먼저 간략하게 덕수초등학교 연혁에 대해서 알아본다. 덕수초등학교는 1912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하였기에 2025년인 올해가 개교 113주년이다. 1934년부터는 남학생을 모집하면서 학교명이 덕수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1933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에 위생실이 설치되자 한성치과의사회에서는 위생실내에 치과치료실을 마련하여 1800명 아동의 치과 치료를 담당하였다. 치과의사 함석태와 조경호가 교대로 매주 4일(월,수,목,토)이나 학교 치과치료실을 방문하여 봉사하였다. 일본 학생들이 다니는 각 심상소학교에는 10년 전부터 치과진료실이 설치되었고,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단체인 경성치과의사회 회원들이 진료를 담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경성부 학무과에서는 치과진료실이 구비된 심상소학교에 매년 5백원씩 보조를 하고 있었다. 반면에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18개의 보통학교중에서 치과진료실이 설치된 곳은 덕수공보가 유일하다. 함석태와 조경호는 조선 아동들이 다니는 보통학교에도 심상소학교처럼 경성부 당국자에게 보조금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학부형들에게도 도회지 아동들의 충치 발생률이 높아지고 있으니 자녀들의 치아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성치과의 사회에서는 지난 3년 동안 덕수공보 아동들의 구강검진 결과 전체 아동의 65%가 충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통계를 보고하였다[7]. 함석태와 조경호는 그동안 271명의 아동에게 충치치료를 하였다. 따라서 경성에 있는 다른 보통학교에도 치과진료실이 긴급히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치의학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덕수초등학교를 직접 방문하였다. 학교 정문 앞에서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 덕수공보를 일주일에 4회나 방문하면서 치과진료 봉사를 하였던 함석태와 조경호 선생의 노고를 떠오르면서 두 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깊게 머리를 숙였다. 본 고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를 구강위생 계몽 측면에서 조명해보았다. 함석태는 언행일치(言行一致)와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실천하는 일제강점기 전문직업인이었다. 일제강점기 함석태의 독무대였던 치과계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봉사적 활동의 일환으로 구강 위생 계몽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음을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함석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거의 10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중요한 미션이라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창립된 치과의사 단체는 3개이며, 함석태는 3개의 단체에 모두 회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각각의 3개 단체를 설명한 후 함석태가 그 단체에서 어떤 존재감이었는지 기록으로 확인해 본다. 1909년 조선에 개원하고 있었던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숫자가 5명이 되자 친목단체 형식으로 경성치과의사회 모임이 만들어졌다. 1912년 1월 16일 일본인으로서 정규의 학교 교육을 받은 치과의사들이, 그들만으로 최초로 경성치과의사회를 창립하였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창립된 치과의사회는 1912년 경성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만든 경성치과의사회이다. 경성치과의사회는 1942년 한국인으로 구성된 한성치과의사회와 통합되면서 해산되었다. 1921년 10월 2일 경성치과의사회를 중심으로 부산, 평양에 있는 일본 치과의사들도 이 단체에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치과의사 단체의 형식을 갖춘 조선치과의사회가 창립되었다. 1932년에는 시단위 치과의사 단체가 참여하면서 명칭이 조선연합치과의사회로 변경되었고, 1941년에는 13개 도단위 단체 가맹하면서 다시 조선치과의사회로 단체명이 바뀌었다. 1944년에는 조선치과의사회가 조선총독 명령에 의해 해산된 후, 관선치과의사회가 탄생하였다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이 단체는 자연 소멸되었다. 1925년 4월 15일 이후 어느 날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이 모여 창립된 단체가 한성치과의사회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창립한 최초의 치과의사 단체가 한성치과의사회다. 1928년부터는 회원의 수가 20명이 되면서 각 부서를 만들고 회의 체계를 마련하면서 우리나라의 치과계 발전과 구강계몽에 힘을 쏟았다. 창립 후 10여 년 동안 한성치과의사회는 독자적이면서 일본치과의사 단체들과 대등하게 운영되다가 1935년 강제 입회 제도가 마련되면서 조선연합치과의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의 압력으로 일본인 치과의사 단체인 경성치과의사회에 강제로 합병되면서 한성치과의사회는 해산되었다. 일제강점기 한성치과의사회의 활약을 기록으로 확인한 최초의 자료는 1933년부터이다(Fig. 14). 함석태를 필두로 하여 20명의 회원이 충치 예방데이를 맞이하여 무료 진찰 봉사에 참여하였고, 회장인 함석태는 구강계몽을 위한 칼럼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한성치과의사회는 1933년 12월 31일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임원 개선을 하였다[8]. 회장, 부회장, 이사 및 평의원을 갖춘 명실상부 체계화된 단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신문 기사로도 보도되었다. 1932년 일본인 치과의사 우스이 쓰네히데(臼井常英)는 치과에 내원한 환자 3명에게 매독 치료제로 사용되는 살발산을 주사한 것이 치과의사의 업무 범위를 벗어나 의사법을 위반하였다고 하여 고발당했다. 1, 2심에서는 환자 2명은 매독은 없지만 치조농루증이 있고, 나머지 환자 1명은 매독 잠복기에 있고 치조농루가 있어 그 입안을 치료하기 위해 살발산 주사를준 것이므로 의사법 위반이 아니라하여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33년 12월 18일 경성고등법원은 구강매독은 전신질환이므로 치과의사는 구강매독의 치료 권한 없다고 판단, 살발산 주사를 한 치과의사는 치과의사의 업무 범위를 확실히 넘은 것으로 해석하여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이번 판결은 일본과 조선에서 처음 있는 판결례로 남아있으며[9], 이 당시 조선에 현존했던 조선연합치과의사회장과 한성치과의사회장의 치과의사에게 유죄 판결에 대한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필자는 이 기사를 통해서 한성치과의사회가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연합치과의사회와 대등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34년 6월 4일 오후 8시 종로에 있는 중앙청년회관에서는 한성치과의사회 주최로 구강위생 강연회가 열렸다(Fig 15). 한성치과의사회 회장인 함석태가 사회를 맡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강연 사이에 섹스폰과 하와이 앤끼 연주를 추가하여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강연회를 재미있게 할려는 주최 측의 노력도 엿보인다. 22명의 한성치과의사회 회원들이 참여하여 조선 아동들에 대하여 무료 시술을 시행하였다[10]. 함석태는 한성치과의사회 회원들과 함께 1935년 충치예방일 기념 사업으로 15개 공립 보통학교에서 위생강연회와 무료 진찰을 시행하였다[11]. 1935년 연말에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재신임을 받으며 선출되었다[12]. 1936년 한성치과의사회는 충치 예방일 기념행사로 구강 위생 사상을 선전하는 행사와 무료 진료를 시행하였다[13]. 23명의 회원이 무료진료에 참여하였는데, 개업 회원, 경성제국대학과 세브란스 치과교실에 근무하는 회원으로 구성된 진료진이 자랑스럽게 보인다. 한성치과의사회장 함석태는 조선연합치과의사회장과 경성치과의사회장과 함께 충치예방일 홍보차 조선일보를 방문하였다(Fig. 16). 만선지치계 신년광고에서 여러 치과의사 단체들이 보인다. 1936년 신년광고에서 볼 수 없었던 한성치과의사회가 1937년 만선지치계 1월호에서는 보인다(Fig. 17).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전후해서 비상시국이었다. 따라서 치과의사 단체들은 총회도 개최하지 못하였고, 군사후원연맹이 조직되면서 한성치과의사회는 경성부 군사후원연맹에 가맹하였다[14]. 조선연합치과의사회는 조선군사후원연맹에 가입하였다. 1938년 2월 한성치과의사회는 삼각정 1번지(함석태 치과)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개선하였다[15]. 한성치과의사회장 함석태는 이번에도 조선연합치과의사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충치예방일 홍보차 조선일보사를 방문하였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현하여 ‘충치데이를 당하야’란 제목으로 구강위생 계몽에 나섰다[16]. 6월 4일에는 탁아소 주치의 한소제와 함께 ‘이를 지킵시다’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17]. 1938년 충치예방일 행사에서는 경성에 있는 공립소학교 아동 3만명에게 충치와 치과 위생에 관한 홍보물을 배부하였고, 23명의 회원이 무료진료에 참여하였다[18]. 올해에는 특별하게 충치예방데이를 홍보하는 신문광고에 한성치과의사회 회원 여러 명이 참가하였다. 회장인 함석태는 ‘재래의 전습인 고치법’이라는 제목의 구강위생 칼럼을 게재하였다(Fig. 18). 우리 선조들께서 구강 건강을 위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는 칼럼이다. 1925년 4월 15일 어느날 한국인 치과의사들로 창립된 한성치과의사회는 함석태가 창립한 해부터 1938년까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38년 12월 정기총회에서 임원을 개선한 결과 함석태는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이사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신설하여 박명진이 선임되었다(Fig. 19). 한성치과의사회는 함석태가 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1939년, 1940년, 1942년에 충치예방일 기념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Fig. 20). 일제강점기 일본인 치과의사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창립한 한성치과의사회 창립자 함석태는 대한민국 치과계에서 최초의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가진 인물이다. 한국인 최초로 정규 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한국인 최초의 치과 개원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치과의사 단체 초대회장.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험난한 길을 개척한 함석태 이름 석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함석태의 독무대였던 치과계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봉사적 활동의 일환으로 구강 위생 계몽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음을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함석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거의 100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중요한 미션이라 생각한다.